슬픈 외국어 (문학사상사, 김진욱 옮김) / やがて哀しき外国語
1949년생인 하루키가 40대 초 (42세즈음)에 프린스턴(미국)에 머물렀을 때의 이야기이다. 소설을 쓰고, 마라톤을 뛰고, 요리를 해 식사를 했을 것이고, 그리고는 이런 이야기들을 쓴 것이다. 세상을 바라볼 때 관조적으로 다가오는 느낌. 세상이 이렇게 보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일까?
- 작가라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그럴지 모르는데, 나는 어느 편이냐 하면, 글자를 써나가면서 사물을 생각하는 성격이다. 글자를 쓰고 나서 시각적으로 사고하는 게 편할 때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는 매달 그 정도 분량의 원고를 씀으로서 넓게 사고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생각한다.
- 결국 그런 '얼핏 보기에는 평화롭고 안정된 보통 장소가 그 밑바닥에 품고 있는 공포'야말로 스티븐 킹이 오랫동안 써온 것이고, 그의 두터운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도 '얼핏 보기에는 평화롭고 안정된 보통 장소'에 사는 보통 시민들이고, 그런 킹의 사생활을 위협하는 가벼운 정신병자, 즉 '좀 이상한 사람들'도 역시 그 '얼핏 보기에는 평화롭고 안정된 보통 장소'에서 온 사람들인 것이다.
- 그날 밤에는 디지 갈레스티라는 그룹이 연주를 했는데, 꽤 들을만했다. 결코 싼 집은 아니었지만, 그만큼의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연주였다. 하지만 만약 그 연주를 듣지 못했다면 후회했을 것 같으냐고 누가 묻는다면, 솔직히 들을 수 있어서 좋긴 했지만, 못 들었다고 해도 그렇게 후회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가 뉴욕의 다른 재즈 클럽에서 들은 다른 음악인들의 무대도 대개는 그 정도 수준이었다. 나쁘지는 않고 즐겁다. 하지만 놓쳐서 안타깝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 결국 유감스럽긴 하지만, 재즈는 점차 오늘을 살아가는 동시대의 음악이 아니게 된 거라고 생가한다. 잔인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느낀다.
- 그렇다고 새로운 재즈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새로운 재즈도 듣고 있으면 즐겁고, 역시 재즈는 좋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거기에는 뭔가 마음 깊은 곳을 뒤흔드는 그 무엇이 없다. 지금 여기에서 뭔가가 생기려고 한다는 흥분이 없다. 나로서는 그런 것에, 지난날의 열기에 대한 기억만으로 지탱되고 있는 듯한 것에 흥미를 가질 수 없을 뿐이다.
- 지금 미국인들은 일본에서의 새로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하고 있고, 그것은 일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다. 일본 문학이 예전에 남미 문학이 해낸 것처럼, 강력한 전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스럽지만, 어느 정도의 약진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 그리고 그것을 실현함으로써 일본 문학도 자동적으로 활성화될 것이라고 믿는다. 일본어로 소설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일본어를 상대화하는 것, 일본인이면서 다시 한 번 일본인의 성격을 상대화하는 것 - 앞으로는 이런 일이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 내가 영어로 유창하게 말할 수 없는 걸 변명하려는건 아니지만, 외국어를 술술 할 수 있고,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고 해서, 개인과 개인의 마음이 쉽게 통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막힘 없이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으면 할 수 있을수록, 절망감이 더 심해질 수 도 있고, 더듬거리며 대화를 나눌 때야말로 마음이 더 잘 통하는 경우도 있다.
- 일단 어떤 압도적인 경험을 하고 나면, 사람들은 그 경험이 압도적일수록 그것을 구체적인 문장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알 수 없는 심한 무력감에 사로잡히는게 아닐까 한다. // 아무리 노력해도 그 당시 자기가 생생하게 느낀 것을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재현할 수 없다는 스트레스는, 당사자에게는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닐 것이다.
- 그런데 신기하게도 열명의 손님 가운데 한두 사람만이 가게를 마음에 들어한다면, 그 한두명이 당신이 하는 일을 _정말로_ 마음에 들어한다면,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가게에 와야겠다고 생각해 준다면, 가게는 그런대로 유지되어 나가게 마련이다. // 열 명 중에 여덟이나 아홉 명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도 열 명 중 한두 사람만이 정말로 마음에 들어하는 편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런 것을 가게를 운영하면서 피부로 절실히 느꼈다. 정말이지 뼈를 깎듯이 그것을 배웠다.
- 나는 그 때 익숙하지 않은 일에 섣불리 손대는 게 아니며, 수월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수월하게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 나는 솔직히 말해서 근대나 현대에 상관없이 일본 작가의 작품은 별로 읽지 않았는데,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요시유키 준노스케, 쇼야 준조, 고지마 노부오, 야스오카 료타로, 엔도 슈사쿠 같은 작가들의 작품은 - 어디까지나 _내 입장에서_지만 - 비교적 열심히 읽은 편이다.
-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슬픈 외국어'라는 제목은 나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절실한 울림을 갖고 다가온다... 이렇다 할 특별한 이유도 없이 불쑥 '슬픈 외국어' 라는 말이 만화에서 박스에 표현된 대사처럼 머리 위에 떠오르는 것이다. // 그러나 '슬픈'이라고 해도 그것은 외국어로 말해야 하는 것이 힘들다거나, 외국어가 잘되지 않아 슬프다는 건 아니다. 물론 약간은 그런 점도 있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슨 운명 때문인지 나에게 있어 우리말처럼 설명의 필요 없이 스스로 명백한 성격의 자명성을 갖지 않는 언어에 이렇게 둘러싸여 있다는 상황 자체가 일종의 슬픔에 가까 운 느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쩐지 말을 빙빙 돌리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된다. // 그리고 가끔 일본에 돌아오면 이번에는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_이런 것들은_ 정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자명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어 웬지 모르게 슬퍼진다.... // 어디에 있을지라도 우리는 모두 어떤 부분에서는 이방인이고, 우리가 언젠가 그 자명하지 못한 영역에서 무언의 자명성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버림을 받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으스스한 회의의 감각이다.
그리고 또 다른 여행기, '먼 북소리'
먼 북소리 (중앙일보사, 김난주 옮김) / 遠い太鼓
39-41세 그리스, 이탈리아에 머물렀던 자국들이다. 하루키는 거기서도 소설을 쓰고 와인을 마시고 거리를 달리면서 짜투리 시간에 여행기를 썼다.. 40세를 앞두고 하루키 역시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을 터, 본인은 먼 북소리에 이끌려 긴 여행을 떠났다고 쓰고 있지만 결국 인생의 중반을 맞아 보다 나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더욱 더 낯선 공간을 찾아 들어간 것이다. 초조하였을 까닭이다, 나 역시 그렇듯이. 그러나 40세의 몇년 전, 해답을 찾기 위해 떠날 수 있었던 하루키와는 달리 나는 40세를 석달 앞둔 상태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하루키는 40세의 석달 전에 '노르웨이의 숲'을 탈고 하였는데...
- 내가 스케치(글쓰기)를 하기 시작한 본래의 목적은 한 가지는 외국에 있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궤도를 벗어나 어딘가로 달아나 버릴 것만 같은 자신의 의식을 일정한 문장적 레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잡아두는 일에 있었다.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보았다고 쓰는 일 - 그것이 기본적인 자세이다. 자신이 느낀 것을 정말 느낀 것처럼 쓰는 것이다. 안이한 감상이나 일반론화를 배척하고 가능한 한 심플하게 그리고 리얼하게 쓰는 것. 여러가지로 다양하게 변해가는 정경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든 지속적으로 상대화하는 것. 이런 작업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꽤 힘든 일이다. 뜻대로 잘 되는 경우도 있지만 잘 안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문장을 쓴다는 작업을 스스로의 존재 측량기로 사용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줄곧 사용하는 것이다.
- 내가 결혼 생활에서 배운 인생의 비밀은 이런 것이다. 아직 모르고 계신 분들은 잘 기억해 두십시오. _여성은 화를 내고 싶은 일이 있어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내고 싶어서 화를 내는 것이다. 그리고 화를 내고 싶어하는 때에 참지 않고 화를 낼 수 있도록 해주지 않으면 미래에 더 큰일이 생긴다._
- 내 생각이 이렇듯 '한 줄기 인생'을 걷는 장인 기질의 사람을 우연찮게 만날 수 있는 것 또한 이탈리아라는 나라의 미덕인 듯하다 이 나라에는 적당주의자도 많지만 (실로 많다), 일부 사람들은 정말 성실하게 빈틈없이 일을 한다. 그들은 혼자서 묵묵히 좋은 물건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물건에서는 생활의 산미 같은 것이 배어있다. 그런 부분이, 이러니저러니 불평을 늘어 놓으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이탈리아의 매력, 저력이다. 일본의 획일적인 사회와는 다른 진정한 혼이 있는 것이다. 결국은 일부러 토스카나까지 포도주를 사러 간 보람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하루키가 마흔을 맞아 써내려간 소설, '노르웨이의 숲'
노르웨이의 숲 (열림원, 허호 옮김) / ノルウェイの森
처음 읽은 것은 스무살 무렵 "상실의 시대"로 이름지어진 책이었다. 그 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퍽 깊이 와닿았다는 기억만 남아있을 뿐이다, 십대에 헤르만 헷세, 이문열을 읽었을 때 처럼. 그리고 후에 서른 즈음에 '서른, 잔치는 끝났다'와 '삼십세'를 읽었을 때 처럼. 이십년만에 다시 읽은 소설. 그 소설을 썼을 즈음의 하루키가 나와 비슷한 나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소설에 뭔가 들어 있다고 느낄때 마다 그만큼 조바심이 난다.
-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신사야."
- "무언가에 그렇게 얽매이는 건 좋아하지 않아." "당신은 비교적 모든 것을 확실하게 해두는 성격인가 봐요. 그렇죠?" "음,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말했다. "그래서 남들이 좋아하지 않는가 봐. 옛날부터 그랬어." "그것은 당신이, 남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에 따라서는 당신에게 화를 내는게 아닐까요." 그녀는 팔에 턱을 괴면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하지만 저는 당신과 이야기하는 게 좋아요. 말투도 아주 별나고 말이죠. '무언가에 그렇게 얽매이는 건 좋아하지 않아.' "
- 하지만 일정한 연령이 지나면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음악을 연주해야만 해요. 음악이란 그런 것이에요.
- "그게 미도리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인가?" "그래요." "맙소사." 나는 고개를 저었다.
- "제가 보기에는 세상 사람들은 모두들 악착같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제 생각이 틀린 걸까요?" "그건 노력이 아니라 단순한 노동이지." 나가자와는 간단히 말했다. "내가 말하는 노력이란 그런 게 아니야. 노력이란 보다 더 주체적인 목적하에 행해지는 거라구."
- 무언가 방도를 강구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몰랐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조만간 무언가 방도를 강구해야 할 때가 올 테니, 그때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 _적어도 지금은_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